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인물 (문단 편집) == 의인 == 이 사람들은 나치에 몸을 담았지만 '''민간인을 구한 위대한 영웅들'''이다. 민간인은 ★로, 군인들은 ☆로 표기한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와 [[하얀 장미]] 등 직접적으로 민간인들을 구출한 것은 아니지만 나치에 저항했던 인물은 밑의 저항자들 항목에서 따로 서술한다. * '''[[https://www.google.co.kr/search?q=%EC%96%80+%EC%9E%90%EB%B9%88%EC%8A%A4%ED%82%A4&client=ms-android-samsung-ss&sxsrf=ALiCzsaNFCGMumjN8lnqiGKSsA1mxB4Gcw%3A1665504823299&ei=N5ZFY9LmEau22roP-s-YwAo&oq=%EC%96%80+%EC%9E%90%EB%B9%88%EC%8A%A4%ED%82%A4&gs_lcp=ChNtb2JpbGUtZ3dzLXdpei1zZXJwEAMyBAgAEB4yBQghEKABMgUIIRCgAToECB4QCjoHCCEQoAEQCjoECCEQCkoECEEYAVDGB1jxE2ChFmgAcAB4AIABqAGIAfYNkgEEMC4xM5gBAKABAcABAQ&sclient=mobile-gws-wiz-serp&si=AC1wQDBgEJLyWEcKt9OBq7RdshIT5EwSYdpD1yAy6XwUvdtrFxTjOYS5577K7ODyxrlY65QB0_pczzv65bZRivsS81N6rSuEdrG4axkfSgVV0wrG8ghGcuQ%3D&ictx=1&ved=2ahUKEwj1nbL-yNj6AhXLmlYBHQ6SDQkQ9YYDKAN6BAgPEAc#ip=1|얀 자빈스키]], 안토니나 자빈스카''' ★ 나치 독일이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점령하려 할 때 자빈스키 부부는 바르샤바 동물원의 관리자였다. 독일의 동물학자 루츠 헤크로부터 동물원을 나치군 식량 조달용 돼지 농장으로 개조하고 운영하도록 허락받았고, 자빈스키 부부는 이 돼지들의 사료를 구하기 위해 [[게토]]의 음식물 쓰레기를 가져오곤 했는데 이 방식으로 300여 명의 유대인을 구했다. * '''[[욘 라베]]''' ★ 일명 난징의 부처로 불리며 [[나치 독일]]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다. '''[[난징 대학살]] 당시에 수많은 난징 시민들을 살린 인물'''이다. 그러나 말년은 영 좋지 못해서 가난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그의 일화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그 영화에서는 그가 나중에 반나치로 전향하게 되지만 실제로 그는 죽을 때까지 [[아돌프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영화 결말을 반드시 반나치로 만들어야 했냐.“ 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 '''[[오스카 쉰들러]]''' ★ 비록 부정부패에 쩔어 있던 인물이었으나 '''자신의 재산을 몽땅 털면서까지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나치당 인사 중에서 욘 라베와 함께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 '''[[알베르트 괴링]]''' ★ [[헤르만 괴링]]의 동생이지만 형과는 반대로 나치에 부정적인 인물이었다. 형의 빽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구출하였고 그 공로로 전범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헤르만도 동생이 이런 일을 하고 다닌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고 그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아무 말없이 들어 주곤 했다. * '''[[하인츠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하인츠 지크프리트 오이겐 하이드리히]]'''(Heinz Heydrich, 1905년 9월 29일 - 1944년 11월 19일) ☆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en/thumb/2/26/Reinhardheinz.jpg/220px-Reinhardheinz.jpg|오른쪽의 인물이 하인츠 오이겐 하이드리히이고, 왼쪽은 그의 형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이다.]][[https://www.google.com/search?q=Heinz+Siegfried+Heydrich&rlz=1C1AVFC_enKR853KR854&sxsrf=ACYBGNRLmoquuyPr1tExqu9fg4LZlZHIJg:1575227660514&source=lnms&tbm=isch&sa=X&ved=2ahUKEwjUu5SplJXmAhVqyYsBHdXCAfEQ_AUoAXoECBAQAw&biw=1280&bih=695#imgrc=_|생전 그의 얼굴]][* 참고로 안경 쓴 친위대 장교가 그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남동생으로 무장친위대 중위이다.[* 무장친위대 다수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걸 생각하면 예외적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의 주도자였던 형과 달리 자신은 유대인과 [[집시]]족을 구한 영웅이 되었다. 그는 형이 자행한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몰랐으나, 형이 암살당한 후 그 행적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다 유대인 탈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게슈타포가 자기를 조사하고 있단 풍문이 돌자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후일 게슈타포 문건을 조사한 결과로는 하인츠의 유대인 구출은 [[게슈타포]]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고 단지 종이 공급의 부족에 대한 형식적 조사였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했던 셸렌베르크가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자식으로는 아들인 페터 토마스 하이드리히(1931~2003), 하르트무트와 딸인 이사, 잉그리드가 있으며, 페터는 자신의 큰아버지인 라인하르트의 전쟁범죄를 인정하였다. * '''[[조르조 페를라스카]]''' ★ 나치 독일의 인물과는 상관없지만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들을 구출한 인물이기 때문에 여기에 올린다. * '''[[빌헬름 호젠펠트]]''' ☆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슈필만[* 독일어의 sp는 어두에서 '슈프'라고 읽는다. 다만 슈필만은 독일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기 때문에 독일식인 Spielmann 이 아닌 Szpilman이다.]을 구해준 그 독일군 장교다. 그 말고도 다른 유대인과 폴란드 사람들을 도와준 의인이다. 수용소를 담당했을 때는 자기 직권을 남용해 가족들이 자유롭게 면회할 수 있도록 했고, 스포츠 센터를 담당했을 때는 필요한 서류 등을 위조해 유대인과 지하 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던 폴란드인 등을 스포츠 센터 직원으로 만들어 숨겨 주었다. 한 가지 의문점이 드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호의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꼭 이상한 것은 아닌 게 당시엔 인종 말살 같은 [[전쟁범죄]]는 혐오하면서도 부강한 조국을 만들어 나가는 나치를 지지하던 군인들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히틀러를 천재라고 칭하는 등 나치 독일의 행보를 지지하던 초반과는 달리 후반부로 갈수록 일기와 편지에 조목조목 엄청난 나치 비판을 적어 놓았고, 슈필만을 만났을 때는 독일인인 게 부끄럽다고 말했다. 그가 소련군의 포로가 됐을 때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이 선처를 호소했고, 비록 풀려나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이후 2007년에 폴란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메달인 폴로니아 레스티투타를, 2008년에 야드 바솀의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 칭호를 받았다. * '''[[하인츠 드로셀]]''' ☆ 나치에 항거하여 적 포로와 유대인들을 구출시켰고 유대인 여인들을 구해냈다. * '''[[라울 발렌베리]]''' ★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 측 인물과는 상관없지만 나치에게서 유대인들을 구출하였으므로 여기에 올린다. [[스웨덴]]의 사업가[* 유럽 최대(最大), 그리고 최고(最古) 재벌인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다.]로 유대인들에게 가짜 서류와 스웨덴 [[비자]]를 발급해 주는 식으로 2만 명의 유대인의 목숨을 살리고, 1만 3천명의 유대인들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독일군 사령관인 [[https://en.m.wikipedia.org/wiki/August_Schmidhuber|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 [[슈츠슈타펠|SS]][[소장(계급)|소장]]을 '''협박'''하여 거주지에 갇힌 유대인 7만 명이 [[아돌프 아이히만|악마의 손길]]에 끌려가는 것을 방지하였다. 이런 행적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당시 철강을 수입하던, 또한 인종적으로 매우 우수하다고 여겼던 [[스웨덴]]과의 우호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 이러한 발렌베리의 태도를 눈감아 주었다. 하지만 뒤로는 암살을 시도한 걸 보면 그의 행적이 매우 거슬리긴 했던 듯하다. 그리고 1945년 1월 17일, 발렌베리는 전후 유대인 문제 등으로 소련군을 찾아갔다 독일 스파이로 오해받아 NKVD에 체포되고, 그 후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수많은 증언과 행방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으나 결국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 '''[[안톤 슈미트]]''' ☆ 1900년 1월 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오스트리아)|빈]]에서 태어났고, [[독일 국방군]] [[중사]]로 복무했다. [[슈츠슈타펠|SS]]로부터 250명의 유대인들을 구해 주다 이 사실이 발각돼 체포되어 그들을 숨겨 줬다는 죄목으로 1942년 4월 13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서 처형되었다. 가족들에게 남긴 유언은 '''"나는 그저 인간으로써 행동했고,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 '''[[https://en.m.wikipedia.org/wiki/Max_Liedtke|막스 리트케]](Max Liedtke), [[https://en.m.wikipedia.org/wiki/Albert_Battel|알베르트 바텔]](Albert Battel)''' ☆ 독일 국방군의 소령과 중위이다. 막스 리트케는 1894년 동프로이센에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나왔으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베테랑이다. 그는 초기부터 나치에 부정적이었는데, 1차 대전 이후 그라이프스발트의 한 신문 편집장으로 재직하며 '''나치를 성토하다 1935년에 자리에서 강제로 쫒겨나기도 했다.''' 그러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국방군에 징병되었고, 1942년에는 폴란드 프셰미실[* Przemyśl. 폴란드 남동부 국경지대의 도시. 폴란드의 독립 이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령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의 도시였으며,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곳의 프셰미실 요새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대대적인 공방전을 벌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https://youtu.be/856nOROd5ig|참고 영상]]] 지역 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한편 알베르트 바텔은 그의 부관으로, 1891년 슐레지엔 주에서 태어났다. 리트케와 마찬가지로 그 또한 1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2차대전 당시에는 이미 50줄에 들어선 상태에서 예비역 중위로 징집되었다. 그는 1933년 '''[[나치당]]에 가입한 나치당원이었지만 반유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치당원이 된 이후에도 많은 유대인 지인들과 교류했고, 심지어 독일의 탄압으로 어려운 형편에 처한 유대인 친구를 '''재정적으로 돕다가 당 법정에 섰던 적이 있으며''', 리트케의 부관으로 프셰미실 지역에 도착한 이후에도 학창시절 급우였던 프셰미실 게토의 유대인 평의회 위원장 둘디크(Duldig)와 진심어린 모습으로 악수를 나눈 것 때문에 상부에게서 엄청난 질책을 받아야 했다. 후에 그들이 구해낼 유대인들에게는 다행히도 미쳐돌아가던 나치 독일 내부에 얼마 없던 반나치주의자와 반-반유대주의자가 정말 우연하게 사령관과 부관으로 만나 [[게토]]를 관리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42년 7월 26일로 넘어가는 한밤중에 친위대가 프셰미실 게토의 유대인 주민들을 집에서 끌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을 라인하르트 작전[* 폴란드 유대인 절멸 작전. 이 작전 기간 동안 200만 명 가량이 살해되었다.]에 따라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로 이송하여 살해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26일 새벽 5시경 리트케는 친위대 소위 아돌프 벤틴(Adolf Benthin)과 전화하면서 적어도 자신의 부대를 위해 일하는 유대인 남자들만은 이송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총사령부에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미 그는 무선으로 이 사건에 대해 총사령부에 보고한 상태였다. 한편 바텔은 이 보고에 대한 총사령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유대인 게토의 유일한 출입구에 연결된 다리를 봉쇄하고 '''기관총을 사격할 것처럼 위협하여 친위대가 게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친위대가 사람을 보내 항의했으나 바텔은 자신이 그 이전에 이미 프셰미실에 비상사태를 선포했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고 반박했고, 리트케는 그 친위대원에게 자기 부관이 내린 명령이 정당함을 증명하여 돌려보냈다. 이는 친위대에게 쓰라린 굴욕이자 도발이었지만 법적 절차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기에, 친위대는 총사령부에 게토 봉쇄 해제를 요구할 높은 계급의 책임자를 크라쿠프에서 데려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친위대가 결국 뜻을 관철하리라 내다본 바텔은 자기 휘하의 군 차량들을 보내 이미 리트케의 사령부에서 일하고 있던 유대인 노동자 약 90명과 그 가족들 말고도 또다른 240명을 게토에서 데리고 나와 사령부 지하실로 보냈다. 바텔과 리트케는 상황을 제대로 예측했다. 봉쇄는 풀렸고, 7월 27일 이른바 '소개 작전'이 다시 시작되어 둘디크 평의회 의장을 포함한 남은 유대인들은 전부 베우제츠로 이송되어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그러나 친위대원들은 리트케의 부대가 막고 있는 국방군 사령부 내부로는 진입하지 못했으며, '''그 덕에 그 안에 숨어 있던 수백 명의 유대인들은 목숨을 건졌다.''' 한편 이 법적 문제 없는 항명 행위에 격노한 친위대는 사태를 일으킨 당사자인 바텔과 리트케에 대해 조사하여 곧바로 상부에 보고하였고, 나치당원임에도 유대인에 매우 동정적이었던 바텔의 과거 행적들로 인해 이 문제는 심각한 사안으로 분류되어 친위원수 [[하인리히 힘러|힘러]]와 나치당 당수부장 [[마르틴 보어만|보어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후 이에 대한 보복으로 리트케는 프셰미실의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1 기갑군을 따라 [[캅카스]]로 보내졌다. 불행히도 그는 1945년 보른홀름에서 소련군에 생포되어 소련에서 저지른 전범 행위를 조사받으며 지내다 55년 억류 중 죽었다. 반면 바텔은 나치당원의 신분임을 감안해도 그보다는 매우 운이 좋았다. 힘러는 그를 일단 당적에서 제외하고 전쟁이 끝나면 그때 잡아넣기로 결정했지만 결국 나치가 패망함에 따라 바텔이 나치 법정에 서는 일은 없었다. 그는 나치당 고위층이 자신에 대해서 칼을 갈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1944년 심혈관 질환으로 인해 의병 제대했고, 종전 직전 [[국민돌격대]]로 재소집되었다가 소련군에 붙잡혔다. 전후에는 서독에서 살면서 전쟁 전 직업인 변호사로 복귀하려 했으나 탈나치화 재판정에서 나치당에 가입했던 전적이 문제가 되어 4급 전범 단순가담자(Mitläufer)로 판단되었으며, 이 때문에 법률가로 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전후 7년이 지난 1952년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근처의 하터샤임에서 사망했다. 이들의 영웅적인 행동을 기려 이스라엘에서는 그들에게 각각 1993년과 1981년에 '''열방의 의인''' 칭호를 부여했다.[* 출처 1:《나치의 병사들》, 죙케 나이첼 및 하랄트 벨처, 민음사, 518p. 출처 2: 위키백과 ] * '''[[https://ko.m.wikipedia.org/wiki/%EC%BF%A0%EB%A5%B4%ED%8A%B8_%EA%B2%8C%EB%A5%B4%EC%8A%88%ED%83%80%EC%9D%B8|쿠르트 게르슈타인]]''' ☆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나치 당원이 되기 전 독일 유수의 대학인 아헨공과대학을 나왔다. 1941년 초 SS가 되었는데 [[T4 작전]]으로 정신지체를 앓던 자신의 누이가 처형되자 SS내부의 일을 직접 알기 위해 일부러 자원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속승진을 거듭하여 1942년 중순 에는 절멸수용소의 방역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이 되었다. 게르슈타인은 [[베우제츠]]와 [[트레블링카]]의 위생상태를 점검하고 [[아우슈비츠]]에 치클론 B를 납품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1942년 8월 19~20일 베우제츠와 트레블링카를 직접 방문한 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베우제츠에서는 아래에 기술한 것처럼 3000명의 유대인 처형을 직접 목격했고 바로 다음날 견학한 트레블링카에서는 학살을 직접 목격하진 않았지만 광장에 엄청나게 쌓인 희생자들의 옷가지와 물품들을 목격했다. 견학 후 며칠 뒤 그는 바르샤바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서 스웨덴 외교관 예란 본 오테르를 만나 그가 본 것을 들려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국제사회에 퍼뜨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한편 바티칸,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와도 접촉해 홀로코스트 사실을 알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스웨덴에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등 1945년 전까지 그의 노력은 거의 어떤 효과도 없었다. 하지만 영국은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를 통해 그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고 1945년 4월 그가 연합국에 투항하자 연합국은 그가 목격한 사실을 보고서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따라 게르슈타인 보고서가 만들어져 홀로코스트를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그는 SS였음에도 이런 행적 덕분에 프랑스에서 부드럽고 동정적인 대우를 받았다. 얼마 뒤 그는 셰르셔 미디 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안타깝게도 거기서는 그의 행적을 전혀 몰랐는지 그를 여타 전범들과 같은 대우를 해버렸고, 결국 그는 7월 25일 감방 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한편 그가 죽은 후 게르슈타인 보고서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어 [[헤르만 괴링]]과 [[한스 프랑크]]를 비롯한 전범 여럿을 지옥으로 보냈고, 1961년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에도 등장하여 아이히만을 지중해의 물귀신으로 만들었다. * '''[[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C%8A%A4_%EB%AE%8C%ED%9E%88|한스 뮌히]]'''☆ 나치 친위대소속 군의관이었으며, 아우슈비츠의 의사이기도 했다. 그 악명높은 요제프 멩겔레가 시작한 인간 실험에 참가했지만, 다른 의사들과 달리 일부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인체에 무해한 실험을 고안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문당하는걸 막았다. 다른 의사들과 달리 수용소에 새로운 포로가 들어올때 가스실로 보내거나 실험할 대상을 고르는 행위를 완강히 거부했으며, 자신의 실험 대상자로 선택된 사람들을 항상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며, 심지어 몇명이 도망칠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전범재판에 회부됬지만, 자신이 도와줬던 수용소의 포로들이 그를 변호해 주어서 무죄를 선고를 받고 2001년까지 장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